note

1.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언가를 찾아낸다면 그것은 상상력일까, 우연일까, 필연일까.
있음과 없음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은 양극점 사이에서 부유하며 떠도는 것들이 된다. 저쪽 끝과 이쪽 끝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에게 허락된 공간과 거리. 

그 사이에 사는 우리, 불완전한 우리.


있거나, 없거나의 사이에 사는 우리는 무엇이 있고 또 무엇이 없나.

있고 없음의 축에서 우측으로 또 좌측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보면 나한테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 것인지 모든 것이 모호해 진다.


있고 없음.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다면 우리에게는 언어가 필요 없을 것 같다. 모든 것이 명료해 지는 세계. 어쩌면 완벽한 큐브로 닫혀있는 세계. 언어란 우리 입 밖으로 내뿜어지는 숨이다. 닫친 큐브 안에서의 숨소리는 진공이 되어갈 뿐이다.


언어는 이상하리만큼 자생적이며 우주처럼 확장된다. 언어는 왠지 살아있는 유기체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가 존재하는 세상은 아마도 열린 공간일텐데 그 열린 공간은 양극의 이편과 저편의 사이 범위를 그리는 상상의 선 같은 것이다. 상상의 선은 확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가상의 점선이다. “여기까지가 공간이야” 라고 말하다가 잠시 후면 “아니 여기까지 일수도 있어” 라고 말해도 상관없는 그런 선들이다. 우리는 그런 너그러운 공간에서 말하고 대화하며 언어를 확장시켜 왔다. (물론, 내가 경험했던 일부 언어 세계는 매우 권위적이고 확정적이라고 할지라도 보다 큰 범위의 언어 자체는 너그러운 곳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말한 너그러운 공간과 가장 유사한 공간을 지구 안에서 찾는다면 물속이 될 것 같다. 다만 물속에서는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잠시 말소리 자체는 생략하고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물속에 들어가면 분명 물 바닥이 있고 물이 시작되는 지점이 있지만 우리는 거리 감각을 잃고 유영하게 된다. 거리 감각을 잃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 물은 하나의 거대한 세계이다. 물이 있음과 물이 없음의 경계가 만들어낸 무한한 거리감 속에, 그 세계 안에 우리는 다이빙했다.


무한한 거리감을 느껴본 사람들은 그 속에서 어떤 지표나 사인들이 무의미 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변화하는 물의 경계들 사이에서 내 위치는 그저 그 안에 들어 있음 정도로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몇 해 전 다이빙을 하며 나는 물속에서 느꼈다. 무엇이 있거나 없거나 중 하나를 꿈꿔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없음을 꿈꾸겠다고! 


그러나 모든 것을 없게 만드는 것은 이 세계에서는 불가능 할 뿐더러 또 혹시나 너무 무책임한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와 어느 지점에서 타협을 보아야 했는데, 없음의 감각을 유지하면서 없어지기 바로 직전의 지점에서 딱 멈추어 바라본 것들을 만들어 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 대신 약간 옅어 지거나, 완전히 무의미해 지는 것 대신 자칫 의미가 사라질 듯 보이거나, 완전히 쓸모 없는 것 대신 좀 하찮아 보이거나, 완전히 소실된 것 대신 꺼져가는듯 보이게, 지워진 것이 아니라 약간의 자국이 남은 듯 보이도록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래야만 내가 살아가는 이 사이 공간의 없음 한쪽 끝 바로 직전에서 완전히 끝난 무언가가 아니라 여전히 생성 될 수 있는 여지의 공간 안에 나를 조금 너그럽게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친구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어쩌면 너는 멸망을 한번쯤은 겪어본 것 같다고 말했다.

한번쯤 경험해 본 것 같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있음을 꿈꾸어 보다가 차라리 없음을 택하리라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무너뜨려본 경험.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 남은 흩어진 흔적과 자국들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납작한 세계 직전의 언어가 되었다. 세상 가장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아닌 말 말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무언가를 찾아낸다면

그것은 상상력일까, 우연일까, 필연일까.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은 상상력과 우연의 조합이 만들어낸 필연 같다.

나는 필연처럼 우연의 자국들을 보며 상상력을 가동한다. 상상의 맨 마지막 자락에는 언제나 어떤 언어들이 피어 올랐다.


없음에서 창조된 있음은 가장 가볍게, 없는 듯이, 흔들리도록, 무의미해 보여야 한다. 없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연약한 있음… 나는 그런 말을 하고 싶다. 


 


2.

너는 대체 어떤 멸망을 겪었냐는 물음이 있었다.

어떤 멸망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세상에 멸망을 겪지 않은 이들은 없다. 단지 자신의 무너짐을 인식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나는 나의 내면에서 소복히 쌓인 소금 사막이 제아무리 습기에 절어 단단해졌더라도 매일같이 겉표면이 풍식되고 풀풀 날아가고 있는 짭쪼름한 마음 덩어리를 발견한다. 어제보다 오늘 나는 몇미리나 더 휑해졌다. 이런식으로라면 멸망은 예정된 순서다. 그러나 딱히 불안하거나 우울하진 않다. 휑해지는 겉면의 두께만큼 퇴적되는 언어의 질량은 늘어난다. 멸망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의 시작이다. 


언어가 존재하는 한 그 어떤 천재들도 완전한 무의 세계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무에 대한 천재적인 상상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생각 끝에 나는 언어를 해체 시키겠다는 둥, 언어를 무너뜨리겠다는 둥, 죽음으로써 언어의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 날 수 있겠다는 둥의 구닥다리 이야기를 멈출 수 있었다.(혹여나 과거의 내 인터뷰 내용에서 이러한 내용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지금의 내가 아니라 이미 멸망하고 없어진 나이다.) 오히려 나는 언어를 긍정함으로써, 유기물처럼 생을 지속하는 언어와 한 몸이 됨으로써, 승부수없는 언어와의 대결 구조에서 해방된 나를 발견함으로써 전방위로 조여오던 어떤 외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멸망하기 전에 나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너는 왜 말라빠진 문어처럼 바짝 쪼그라들었냐는 것이다. 바다를 유영하는 촉촉한 문어가 완전히 쪼그라들었다는 것. 그렇게 말라 비틀어 죽은 나. 그래서 후생에는 물로 태어나고 싶었나 보다. 새롭게 언어를 배워가며 자꾸만 물을 상상한다. 물은 움직인다. 


언어에 민감한 사람들이 가지는 공통점 같은 것이 가끔 보이는데 그것은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시간차를 두지 않고 곧바로 잘 감각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움직임을 잘 감각하는 사람들은 복잡하고 섬세한 언어 회로를 가지고 있다. 극도로 예민한 언어 감각을 보여 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그들이 거치고 있을 강도 높은 정신적 노동에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진화한 언어 회로는 얼마나 많은 멸망의 결과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무너져내리고 싶다. 무너질 일이 있어서 무너지는게 아니라 무너져야만 하기 때문에 무너질 것이다. 다소간의 용기가 좀 필요할 것 같다. 좋아하는 시의 한 구절에서 처음이 어렵지 두번째부터는 쉬웠다는 말이 위로가 된다. 




3. 

말은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다 내뱉을 입도 없고 배설할 구멍도 없는데 옆구리를 몇 번을 더 터트려야 원하는게 흘러나올까.




4. 

미지의 우주는 시작도 끝도 머리도 꼬리도 입도 항문도 없어 보인다. 굽어보이기도 하지만 펼쳐져 보이기도 한다. 어두워 보이기도 하지만 찬란해 보이기도 한다. 완전해 보이지만 먼지처럼 쓸데 없다. 그래서 궁극으로 가는 길은 목적지가 없는 무한대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수한 언어의 세계를 우주에 비유하자면 그 세계의 궁극점을 찾고 있는 수많은 예술가들은 실패를 거듭할 수 밖에 없다. 숙명적으로 실패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예술이다. 그 실패들이 쌓은 수많은 무덤들이 밀어 올리고 있는 땅에 예술이 존재하고 내가 존재한다. 이 세계에서 유독 불쑥 솟아 오른 땅은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송곳처럼 어둠을 내리 꽂는 바늘일 것이다.


세상은 모조리 편리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분류체계와 시스템들, 형식과 구조들은 다수가 이용하기에 유리한 방식으로 세상을 짜깁기 해 두었을 것이다. 우리가 직선이라고 부르는 것들, 사각형이라고 부르는 것들,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들에는 세상과 언어가 타협해서 명명하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들은 그 유명한 시의 이야기처럼 불러줌으로 인해 의미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연의 의미가 차지하는 자리를 이름에게 내줌으로 인해 스스로 텅 빈 기표가 되는 일이다. 이름 붙여진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피사체의 희생이 따른다. 이름의 프레임 안으로 재단 되고 짜깁기 되는 것이다.


이름이 육체에 붙어 있는 사람이 있을까. 몸에 붙은 손가락을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름이 잊혀질까 걱정하는 시간은 많았다. 육체는 능동이고 이름은 수동이다. 몸에 붙은 내 손가락이 낯설게 느껴지는 날보다는 내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더 많았다. 언어로 명명된 것들은 휘발 되기가 쉬웠다. 작품은 생각이 나는데 그 제목은 떠오르지 않는다거나, 그 작가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가끔 ‘그 작가 이름이 무엇 무엇인데 몇 년도에 어떤 어떤 작품을 했고…’를 아주 쉽게 열거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할 때가 많았다. 붙여진 것들을 잘 기억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어딘지 모르게 긴장이 됐다. 기억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를 그렇게 불편하게 만들었던 언어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다. 언어화 되는게 불편해서 언어를 열심히 밀어냈더니 내 세계의 끝 테두리에 온통 언어만 모여있다. 파도가 쉴 새 없이 밀어내고 있는 모래땅처럼 내가 밀어낸 것들은 영토가 된다. 그래서 결국 언어의 영토를 피하지 못했다. 그 땅의 지형을 유추해 봄으로써 그 지형도 밖의 세계를 상상해야만 한다. 역시 실패로 돌아갈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경로를 이탈하고 좌초하고 흔들리며 하나의 실패라도 더 쌓아내야만 한다. 실패의 두께가 두꺼워질수록 우주에 낼 수 있는 구멍의 길이가 길어졌다. 



nowhere, but ---here
A place that does not exist, but does exist




5.

나는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고 물을 뿌렸다. 물감이 발려진 평면의 세계가 원본의 세계라면 물을 뿌린 후 우연히 만들어진 물자국은 단단한 세계에 균열을 만드는 하나의 독립 사건같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의미가 되기 이전의 것, 우연한 흔들린 자국처럼 보이는 것들은 무엇인가로 인식되기를 기다리는 것들이 아니다. 혹은 무엇인가로 인식되기를 강요하는 것들도 아니다. 


비 온 뒤 생긴 물웅덩이가 하루 대낮에 금방 증발해서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내 그림은 자칫 아무 것도 아닌것이 될것 같은 느낌이었으면 좋겠다. 개념의 토대가 너무 연약해서 기존의 어떤 언어로 이미지를 잡아두는것이 힘들 만큼, 그래서 도리어 자꾸 다른 언어를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힘이 생기기까지 작업의 과정을 통해 좀 더 긴 시간 동안 내가 원래 알고 있던 언어를 망각하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