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folio

https://drive.google.com/file/d/1sEZeVzx_DkJESO6p3htA1Azdbja9iNVW/view?usp=sharing

(홈페이지를 업데이트하는 동안 임시적으로 포트폴리오 링크를 첨부합니다. - 2021.02.06)

 


CRE8TIVE REPORT, installation view, OCI Museum, 2021

 



CRE8TIVE REPORT, installation view, OCI Museum, 2021





CRE8TIVE REPORT installation view, OCI Museum, 2021

CRE8TIVE REPORT installation view, OCI Museum, 2021









<Watery Project-With the Heart of a Poet>, installation view in Space Imsi, 2021

 





 <Field of Study>, installation view in Art Library of Uijeongbu, 2020




<Hitting>, installation view in 777 Residence Yangju Museum of Art , 2018



cv

contact info.

juyeon.jeon@gmail.com


Juyeon Jeon


Education

2015-2017 Korea University M.F.A.

2011-2014 Korea University B.F.A. / B.A. in English Literature   


Solo Exhibition

2018 <Tickling, Stirring, Hitting, and Twisting>, Residence 777, Yangju

2017 <The Reading Room>, Space Sun+, Seoul

2017 <TEXTured>, Sungbuk Art Center, Seoul


Group Exhibition

2021 <Plastic Garden>, Suwon Museum of Art Eco, Suwon

2021 <Public Art New Hero>, Daecheongho Art Museum, Cheongju

2021 <Undoing>, Space Imsi, Incheon

2021 <CRE8TIVE Report>, OCI Museum, Seoul

2020 <From Text to Context>, Art Museum of Uijeongbu, Uijeongbu

2019 <Garden>, Yangpyung Museum of Art, Yangpyung

2019 <Coexistence>, Osan Museum of Art, Osan 

2019 <Writing Art and Drawing Books>, Kyungbuk National University Art Museum, Daegu

2018 <Language Collection>, Gallery 3an, Seoul

2018 <Nuance>, Residence 777, Yangju

2018 <Perennial Inspiration, Bupyeong Young Artist>, Bupyeong Art Center, Bupyeong  

2018 <Check In>, Residence 777, Yangju

2017 <Another Perspective>, Seoul Art Foundation, Seoul

2017 <10 Years Yet>, Space Sun+, Seoul

2017 <E-Stray>, Baekgong Museum, Gangwondo

2017 <23.5>, Space Sun+, Seoul

2016 <Low Isalnd>, Euljiro R3028, Seoul

2014 <Closing and Opening>, KEPCO Art Center, Seoul


Residence

2020 OCI Museum of Art Residency, Incheon

2018-2019 777Residence, Yangju


Awards

2019 Public Art New Hero

2018 Selected Artist for Bupyeong Cultural Foundation

2017 Selected Artist for Seoul Art Foundation Portfolio Fair


Publication

2019 <Respiration of a Ghost>, Nearity Books




전주연


학력

2015 – 2017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문화예술학과 졸업

2011 – 2014 고려대학교 디자인조형학부 조형미술전공/영어영문학과 이중전공 졸업


개인전

2018 <간지럼 태우기와 휘젓기와 때리기와 반전시키기>, 

      777레지던스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양주

2017 <The Reading Room>, 스페이스선+, 서울

2017 <TEXTured>, 성북예술창작터, 서울


그룹전/기획전


2021 <Plastic Garden>, 수원어린이생태미술체험관, 수원

2021 <퍼블릭아트 뉴히어로>, 대청호미술관, 청주

2021 <Undoing>, 임시공간, 인천

2021 <크리에잇티브 리포트>, OCI미술관, 서울

2020 <텍스트, 콘텍스트가 되다>, 의정부미술도서관, 의정부

2019 <가족정원>, 양평군립미술관, 양평

2019 <같음 다름 공존>, 오산시립미술관, 오산

2019 <예술을 쓰다, 책을 그리다>, 경북대미술관, 대구

2018 <Language Collection>, 갤러리3안, 서울

2018 <뉘앙스>,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양주

2018 <부평문화재단 영아티스트 4기 선정 작가 단체전>, 부평문화재단, 부평 

2018 <듦>,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양주

2017 <포트폴리오 박람회 선정 작가전-또 다른 시선>, 서울예술재단, 서울

2017 <아직, 십 년>, 스페이스선+, 서울

2017 <E-Stray 이-스트레이>, 백공미술관, 강원도

2017 <23.5>, 스페이스선+, 서울

2016 <Low Island>, 을지로복합문화공간 R3028, 서울

2014 <맺음 말 그리고 여는 말>, 한전아트센터, 서울


레지던스

2020 OCI 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

2018-2019 777레지던스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3기 작가


수상 및 선정

2019 퍼블릭아트 뉴히어로 작가

2018 부평문화재단 영아티스트 4기 선정 작가

2017 서울문화재단 포트폴리오 박람회 선정 작가


출판

2019 <우편엽서 유령숨>, 독립출판 니어리티북스





critique

파괴를 통한 소수적 글쓰기의 실천



발터 벤야민은 1차 세계대전을 두고 불확실한 현재를 만든 가장 결정적인 원인으로 보았다고 한다. 온몸으로 전쟁을 겪은 당대인들에게 현재가 어떠했겠는가? 아마도 그것은 안개가 짙게 껴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과 같았을 것이다. 유럽 모더니티는 이렇듯 흐릿하고 불확실한 상태에서 탄생하였다. 전쟁의 폐해는 동시대인들이 꿈꿀 미래와 기억할 과거를 파괴하고 말았다. 따라서 과거와 미래의 목소리는 묵음처리 되었다. 다다의 반예술은 폭력의 문제를 반어법적인 방법으로 표명하였다. 다다이스트들은 신문과 책 속의 문장들을 오려 무의식의 흐름을 문맥과 의미와 상관없이 재배치하여 글쓰기의 형식을 해체함으로서 새로운 글쓰기의 가능성을 써내려갔다. 전주연의 작업은 다다의 실험을 연상시킨다. 끊임없이 의미의 텍스트에서 탈주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행위일까?


전주연은 정치학을 공부하다가 미술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정치학을 전공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언어에 대한 예민함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론가 이문정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언어에 대한 예민함은 그것으로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은 상당히 긴 여운을 남긴다. <긴 몸을 가진 말들의 행적>(2014)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의 과정을 테니스 경기 장면과 연결시켜 말을 주고받는 궤적을 그린 작업이다. 인간은 평생 언어의 굴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소통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유려한 언어 능력이라기보다 관계를 파악하고 조율하는 능력, 즉 통제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사실을 어느 사이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언어를 버린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의미들을 생성시킨다. 따라서 언어에 있어서 듣기와 말하기 모두가 중요하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듣기와 말하기 사이에는 신체반응이 일어난다. 우리는 듣기만 하지 않는다. 읽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 사이에서 몸이 등장한다. 말의 발화는 오랫동안 느꼈던 감정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누군가는 고백의 언어를 듣고 눈물을 흘리거나 뱃속에서 요란한 간지러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언어는 절대 중성적이지 않다. 언어체계를 습득하는 과정을 떠올려보자.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나누면서 언어사용에 있어서 어떤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배우지 않는가. 아마도 전주연은 애초부터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명령의 기제에 민감했던 게 아닐까? <긴 몸을 가진 말들의 행적>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작업들이 언어를 추상화하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도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지점이다. 언어를 통한 소통과정에서 발생하는 서로의 요구의 내용은 모두 지우고 오로지 말들이 오고가는 궤적만을 그린다는 의도는 되레 언어를 작업의 소재로 사용하는 이유를 대변하는 듯하다. 어쩌면 언어가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 구속한다고 믿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의 작업은 언어에서 해방되기 위함이 아닌 비로소 자신의 언어, 타인과 대화하는 언어의 가능성을 찾기 위한 힘겨운 여정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언어는 삶이 아니다. 언어는 삶에 명령을 내린다.”


들뢰즈/가타리는 언어가 소통의 수단이라기보다는 기호체계에 더 가깝다고 보았다. 알다시피 구조주의 언어학은 언어활동을 랑그와 파롤로 구분하는데, 랑그는 하나의 규범이자 체계로서의 언어로 악보와 유사하고, 파롤은 랑그를 자신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현실의 언어로 일반적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들뢰즈/가타리는 이러한 사유체재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언표와 행위의 관계를 잉여의 관계로 본다. 뉴스 기사를 예로 들어서 사건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관심을 가지라는 말은 의사소통이 아닌 생각을 하라는 암묵적 명령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을 화행론(speech-act theory)라 부르는데, 언어와 행동의 관계를 뜻한다. <Hitting>(2018)은 설치 과정과 퍼포먼스의 결과물로 언어와 그것의 해체에 관한 작업이다. 애써 문장을 차례대로 쌓은 후 그 뒤에서 줄넘기를 한다. 앞뒤로 회전하는 줄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과거의 행위와 과거가 된 기록으로서의 문장은 해체된다. 이 역설적인 행위는 언어에 타격을 가함으로써 명령기제로서의 언어를 거부하려는 본능적 몸짓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장이 적힌 막대가 쌓여지는 방식과 위치도 흥미롭다. 아래부터 위로 차례로 쌓아올린 문장이 적힌 막대의 면은 카메라를 향해 전면에 위치한다. 하나씩 쌓다보면 어느새 작가의 키보다 높은 블라인드와 같은 벽이 완성된다. 작가는 텍스트 장벽 뒤에서 줄넘기를 하면서 텍스트 장벽을 해체한다. <Field of Study>(2017)은 논고랑에 새싹을 심듯 곧추 세워진 녹색 계열의 글자들을 바닥에 여백 없이 빼곡하게 쌓은 작업이다. 텍스트는 이미 읽을 수 없는 상태다.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은 문장은 해독이 불가능하다. 그리스인들은 말로 소통하였다. 그들의 말은 아름다웠으나 구두점도 띄어쓰기와 같은 문법이 없는 상태여서 누구나 읽고 해독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들의 말을 그 자체보다 아름답게 만들어낸 사람들은 시리아인들이었다. 어떻게 이방인이 그리스어를 그렇게 훌륭하게 다듬어낼 수 있었을까? 모국어는 익숙한 것이기에 그 한계나 모순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다. 노예가 된 지적인 시리아인들은 그리스 귀족의 대필 노예가 되어 그들의 말을 하나의 랑그가 될 수 있도록 다듬었다. 그렇게 표준이 되는 언어의 형태와 문법이 만들어진다. 형식이 배제되어 읽을 수 없는 텍스트는 말의 지위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아버지의 목소리고, 남성, 권력자, 지배자의 목소리다. 이처럼 띄어쓰기와 구두점이 없는 텍스트는 작가가 느끼는 심리적 강박처럼 보인다. 따라서 심리적인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전주연은 텍스트 패드 위에서 줄넘기, 배드민턴, 테니스, 골프와 같은 신체활동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언어를 파괴하기 위한 신체활동이 건강과 연결된 행위라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직접 듣지는 못하였으나 행위의 상징성은 이 지점에서 더욱 명료해진다. 마치 언어가 건강의 적이라도 된 것 마냥. 한데 불안한 심리상태를 고조시키는 건 우리가 실제로 듣지 못한 숨소리일 것이다. 어쩌면 전주연 작업에서 가장 핵심적인 기제는 바로 ‘호흡’이 아닐까. 글씨더미 위에서 운동을 한다는 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지기 마련이다. 호흡이 거칠어질수록 상대적으로 바닥의 글자들도 부서져 있을 테니 말이다. 그 인과관계가 다소 직접적이고 곧바로 드러나는 결과에 아쉬움도 남는다. 과연 언어는 작가의 공격에 순순히 항복할까? 그렇게 쉽게 언어가 추상이 되어버린다면 작업의 과정이 곧 결과를 위한 공정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우리가 어떤 과정을 집중하면서 뒤따를 수 있는 동력은 시적 공명이 나타날 때 가능하다. 전주연은 시적 공명 대신 우화적 효과를 더 중요한 작업의 기제로 사용하는 듯하다. 공포, 두려움, 도전, 저항과 파괴의 과정이 소박하고 부드럽게 표출되는 건 그만의 특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전 작업 <Aerotext>(2017)는 팽창된 반투명한 풍선 표면 위에 글을 쓴 후 수축된 풍선 위에 마치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글의 흔적은 은유로 충만하다. 숨이 터질 것 같이 부풀어진 허파 속에는 내뱉지 못 한 말들이 가득 차있지만 그 말들은 긴 호흡을 뱉는 동안 추상이 되어 세상 밖에서는 말이 아닌 추상의 덩어리가 된 것만 같다. 반대로도 해석할 수 있다. 부풀어진 자아로 채워진 문장들은 마치 정치연설의 문구로 볼 수도 있겠다. 정치의 순간이 지나고 관료의 시간이 도래하면 이전의 부푼 희망은 어느 새 구겨진 채 버려지는 현실을 떠올릴 수도 있다. 


전주연이 문장의 질서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는 글의 내용과 형식과는 무관한 문제로 보인다. 사실 문장의 파괴는 글쓰기의 일부로 볼 수 있다. 글쓰기를 넘어서는 욕망으로 가득 찬 연애편지는 쓰면 쓸수록 저자의 속마음을 곧이곧대로 보여줄 뿐이다. 남은 건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을 통째 들키는 것이다. 그래서 전주연의 행위는 문장 자체보다 그 행위에 무게가 실린다. 작가의 마음이 혹여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읽을 수 없는 부서진 문장의 조각을 제시한다. 문장을 해독할 수 없음은 오히려 문장 자체가 아니라 전체를 다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더 큰 의미가 실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의 작업을 반대로 관측해 보고자 한다. 그의 근작들은 다소 직접적으로 언어의 외형 파괴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보니 의미전달은 명확해지지만, 반대로 의미에 다가가는 정밀하고 섬세한 과정이 삭제되었다. 그런데 그의 작업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함이 아닌 말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해보자. 즉, 언어의 파괴가  목적이 아닌 언어에 내재하는 정치성과 다수성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시도를 떠올려볼 수 있다. 전주연이 영어권 국가에서 유학을 중도포기하고 되돌아온 후 굳이 영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는 작업을 지속하는 점은 눈여겨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지점에서 언어와 식민주의의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영어가 갖는 의미는 분명하다. 영어텍스트를 부수는 행위는 언어의 지배관계를 재배치하기 위한 선행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전주연이 언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지배적인 언어의 억압에서 탈주할 수 있는가를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전주연이 작업에 날을 세울 수 있으려면 언어에 대한 보다 미시적이고 적극적인 해석과 주장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언어의 추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는 곧 작가의 입장과 태도에 의하여 가능할 터이니 말이다. 특히 순문학이 아닌 조형예술의 형식 안에서 언어를 사용하기에 어떻게 문학과 미술 사이의 틈새를 제시할 수 있을지 앞으로의 탐구와 실험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다. 언어를 부수는 것은 일차적으로 언어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는 정치적 선언과 실천의 의지를 표명한다. 그런데 과연 거기에서 멈출 것인가, 아니면 카프카와 같은 소수적 문학을 실천할 것인가? 이미 <Anabasis>(2017)에서 전주연은 텍스트의 탈영토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를 실험한 바 있다. 이 작업은 텍스트를 스텐실로 만든 후, 그 여백 안에 잉크를 묻힌 표면 위에 유토를 굴려 글씨를 인쇄하는 대항-판화 방식으로 텍스트의 정보와 형태를 유실시킨다. 결국 얼룩이 된 글자의 흔적을 품은 언어의 덩어리가 생산된다. 전주연은 다양한 매체 사이를 횡단하며 언어와 의미 사이의 관계를 실험하는 중이다. 언어에 대한 이 같은 집착은 역설적으로 언어로부터의 탈주를 모색하는 지속적인 실천으로 나타난다. 요컨대 일련의 과정은 언어의 완전한 탈주가 목적이 아니라 과연 언어란 무엇이며 개인, 사회,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 가에 관한 실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현



critique

바람과 태양, 글의 외투 벗기기



전주연의 작업은 이미지가 아닌 글을 출발점으로 한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철학을 전공한 작가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자주, 그리고 훨씬 더 높은 언어의 장벽에 부딪히며 언어라는 도구가 가진 편리함과 명쾌함이 주는 밝은 외면보다는 그것에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에 남이 담은 의미를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허망한 본질을 가까이 체감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오랜 시간 큰 강도로 경험한 것이기에, 작가는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를 다루는 것으로 삶의 방향을 전환한 이후에도 줄곧 텍스트를 주제로 작업해 왔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전주연의 작업은 때로는 텍스트의 구조를 딛고 서려는 호기로움으로, 때로는 텍스트의 바깥에 서서 이를 해체하려는 시도로, 때로는 그 막막함 자체를 드러내거나 또는 한 자락이라도 움켜쥐어보려는 지난하고 수행적인 동작으로 점점 구체화되었다. 


작업을 막 시작하던 때 작가는 서양 철학의 정전으로 여겨지는, 그의 앞에 커다란 벽처럼 놓여있던 텍스트들을 첫 주제로 삼았다. 텍스트를 그것이 올려진 종이에서 도려내어 잔디처럼 바닥에 심고 그 위에서 여러 가지 운동을 하며 뛰어놀거나(<Field of Study>, 2017), 기다란 각목 위에 한줄씩 쓴 텍스트를 차곡차곡 쌓아나간 뒤 그것을 바라보고 줄넘기를 하며 쳐서 쓰러뜨려 보기도 했다(<Hitting>, 2018). “말을 잘 하는 사람보다는 춤을 잘 추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작가가 언어에 수평성을 부여하고 이를 해체해 보려고 진행했던 퍼포먼스들에 수반된 움직임은 다분히 유희적으로 보였지만 동시에 수행적이기도 했다. 커다랗게 분 풍선 450개에 일일이 글을 쓴 뒤 바람을 빼 알아볼 수 없게 만든 흔적들을 줄이어 전시했던 <Aerotext>(2017)나, 텍스트를 도려내고 남은 종이를 흑연 위에 덮고 그 위에서 커다란 유토를 끝없이 굴려 검은 돌을 만들어 냈던,  그리고 이를 반으로 잘라 툭 제시했던 <Anabasis>에서 보거나 짐작할 수 있는 작가의 동작은 구도적이기까지 했다. 


텍스트 위에서 커다란 풍선을 가지고 공놀이를 한 즐거운 흔적과, 100킬로그램의 유토를 굴리고 또 굴려 만들어낸 검은 공은 매한가지로 모두 알아볼 수 없는 결과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Anabasis>는 유독 무심해 보인다. 구도의 심정으로 표면 아래에 감추어진 의미를 끌어올려보려는 노력은 텍스트를 짓밟아버리려는 호기로운 시도만큼이나 속절없이, 읽어낼 수 없는 결과물로 귀속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검은 공의 단면에는 그것이 흡수한 텍스트의 흔적이 마치 대리석처럼 너울지는 검은 모양들로, 매번 자를 때 마다 다르게 찍혀있을 뿐이었다. 마치 많은 고민과 정제 끝에 뱉어냈지만, 결국 모두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글이나 말 처럼 말이다. 


작가가 언어에 천착하는 이유가 언어에서 의미를 추출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기인한 것인지 그것에 실패한 데서 맛본 좌절감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자신의 신체를 사용하여 텍스트의 모양과 구조를 무너뜨리고 알아볼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전주연의 작업은 언어의 구조를 파괴하고 자의적으로 조합해 알아볼 수없는 결과물을 만들었던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의 ‘해체적 글쓰기’를 육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가지고 있었던 텍스트에 대한 애호와 갈망은 동시에 언어가 만들어낸 구조의 바깥에 있고 싶은 욕구이기도 하다. 언어의 구조 바깥에 서기 위하여 언어 자체를 이용했던 작가는 이제 그 구조 바깥에 있는 것을 재료 삼고자 한다. 글과 말의 반대편에 있는 것, 바로 이미지이다. 여전히 우리는 이 이미지에 ‘시각 언어’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있지만 말이다. 이솝 우화 중 <바람과 태양>을 생각하며, 필자에게는 그간 전주연의 텍스트 작업이 언어가 가지고 있는 견고한 옹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거세게 불었던 (그러나 결국 나그네의 겉옷을 벗기는 데는 실패했던) 차가운 바람 같은 작업이었다면, 새롭게 시도한 이미지 작업은 언어의 바깥에서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그것의 외투를 벗겨 내고 마는 따뜻한 태양볕처럼 보였다. 


글이라는 그릇에 담지 못하고 넘쳐버린 것들을 이미지에는 담을 수 있을까? 혹은 글이라는 체로 건지지 못하고 가라앉은 것들을 이미지로는 포섭할 수 있을까? 전주연 작가가 새롭게 시작한 이미지 작업은 크게 두 가지 갈래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그가 지난 1년간 몸담았던 인천 OCI레지던시 근처를 산책하며 찍은 사진들을 활용한 <묽은 프로젝트>(2020)이다. 작가는 목적 없이 산책하는 과정 속에서 눈에 들어온 의미 없는 풍경들을 차곡차곡 사진으로 찍고, 이렇게 포착한 이미지들을 잉크가 스미지 않는 트레팔지 위에 인쇄했다. 작가가 포착한 장면들은 기름을 먹인 듯한 종이 위에 처음에는 선명하게 올라섰으나, 결국 정착하지 못하고 서서히 알아볼 수 없는 모양으로 퍼져 간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미지의 운동이 멈춘 것 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물 위에 떠 있는 기름처럼 표면 위를 천천히 부유할 것이다. 사실은 아주 아주 되직한 액체라서 아주 서서히 흘러내리고 있다는 유리처럼 말이다. 


이렇게 완성된 풍경은 작가가 실제로 본 풍경의 모습과 전혀 닮지 않았다. 처음에는 또렷하게 각인되었을 이미지들은 여러 차례 번지고 흘러내리고 퍼지면서 마치 기억이 흐려지듯 점차 불명확해지고, 어디서 찍은 사진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으로 어스러져 종국에는 아스라한 색면들의 혼합으로 분한다. 작가는 수백 개의 풍선 위에 텍스트를 쓰고 바람을 빼던 때와 마찬가지의 태도로, 많은 양의 이미지들을 높낮이를 조금씩 달리한 바닥에 늘어놓고 고정되지 않고 부유하는 이미지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어떤 것이 거기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로 사용되고는 했던 ‘사진’이라는 지표적 매체가 여기에서는 추상 회화와 다름 없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작가의 두 번째 시도 <묽은 드로잉>(2020)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가장 오래되고 당연한 방식, 즉 회화다. 작가는 아무것도 닮지 않은, 그러므로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화면을 만들려고 한 것 같다. 행여 습관적으로라도 무언가를 닮게 만들어버릴 가능성을 없애려는 듯, 그는 갓 물감을 바른 캔버스 위에 물을 뿌려댔다. 이제 화면 위에는 우연히 만들어진 물자국과 그것이 만들어낸 색의 변화만이 존재한다. 작업을 해 나가는 유희적인 과정이 연상되는 이 작업은 이전에 텍스트로 만든 잔디 위에서 공놀이를 하거나 체조를 했던 <Field of Study>를 떠올리게 한다. 지시적인 이미지를 지워내는 과정은 이미 배운 것을 돌이켜 잊는 과정과 궤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여전히 텍스트를 놓지 못한 것일까,  여러 점의 <묽은 드로잉>들은 캔버스와 동일한 크기의 종이 위에 쓴 텍스트 작업 <묽은 텍스트>(2020)와 짝을 이룬다. 작가노트를 필사한 <묽은 텍스트>는 글씨 자체를 이미지로 받아들이려는 시도로 보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언어 밖에서도 여전히 언어를 생각하고 있음을 방증하기도 한다. 이 병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19년에 발간된 <우편엽서- 유령숨>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편엽서- 유령숨>은 작가가 친구이자 문필가인 엘린과 함께 가명으로 출간한 책이다. 동료가 쓴 난해한 텍스트를 보고 낙서처럼 그린 그림에 반응하여 다시 텍스트가 만들어지는 연속적인 대화 과정을 나란히 병치한 글과 이미지들은 어느 것 하나 명징하거나 정확한 언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묽은 텍스트>에서 작가가 새롭게 사용하는 텍스트 또한 이미지를 보완한다거나 세계를 파악하려는 수단이 아닌, 내면을 읊조리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한다. 작가의 말을 빌자면 “원본의 세계에서 독립된 자국”으로서, 오히려 언어의 불가능성을 증명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 남선우


Note on Water, video installation, 2021

note

1.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언가를 찾아낸다면 그것은 상상력일까, 우연일까, 필연일까.
있음과 없음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은 양극점 사이에서 부유하며 떠도는 것들이 된다. 저쪽 끝과 이쪽 끝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에게 허락된 공간과 거리. 

그 사이에 사는 우리, 불완전한 우리.


있거나, 없거나의 사이에 사는 우리는 무엇이 있고 또 무엇이 없나.

있고 없음의 축에서 우측으로 또 좌측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보면 나한테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 것인지 모든 것이 모호해 진다.


있고 없음.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다면 우리에게는 언어가 필요 없을 것 같다. 모든 것이 명료해 지는 세계. 어쩌면 완벽한 큐브로 닫혀있는 세계. 언어란 우리 입 밖으로 내뿜어지는 숨이다. 닫친 큐브 안에서의 숨소리는 진공이 되어갈 뿐이다.


언어는 이상하리만큼 자생적이며 우주처럼 확장된다. 언어는 왠지 살아있는 유기체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가 존재하는 세상은 아마도 열린 공간일텐데 그 열린 공간은 양극의 이편과 저편의 사이 범위를 그리는 상상의 선 같은 것이다. 상상의 선은 확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가상의 점선이다. “여기까지가 공간이야” 라고 말하다가 잠시 후면 “아니 여기까지 일수도 있어” 라고 말해도 상관없는 그런 선들이다. 우리는 그런 너그러운 공간에서 말하고 대화하며 언어를 확장시켜 왔다. (물론, 내가 경험했던 일부 언어 세계는 매우 권위적이고 확정적이라고 할지라도 보다 큰 범위의 언어 자체는 너그러운 곳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말한 너그러운 공간과 가장 유사한 공간을 지구 안에서 찾는다면 물속이 될 것 같다. 다만 물속에서는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잠시 말소리 자체는 생략하고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물속에 들어가면 분명 물 바닥이 있고 물이 시작되는 지점이 있지만 우리는 거리 감각을 잃고 유영하게 된다. 거리 감각을 잃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 물은 하나의 거대한 세계이다. 물이 있음과 물이 없음의 경계가 만들어낸 무한한 거리감 속에, 그 세계 안에 우리는 다이빙했다.


무한한 거리감을 느껴본 사람들은 그 속에서 어떤 지표나 사인들이 무의미 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변화하는 물의 경계들 사이에서 내 위치는 그저 그 안에 들어 있음 정도로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몇 해 전 다이빙을 하며 나는 물속에서 느꼈다. 무엇이 있거나 없거나 중 하나를 꿈꿔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없음을 꿈꾸겠다고! 


그러나 모든 것을 없게 만드는 것은 이 세계에서는 불가능 할 뿐더러 또 혹시나 너무 무책임한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와 어느 지점에서 타협을 보아야 했는데, 없음의 감각을 유지하면서 없어지기 바로 직전의 지점에서 딱 멈추어 바라본 것들을 만들어 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 대신 약간 옅어 지거나, 완전히 무의미해 지는 것 대신 자칫 의미가 사라질 듯 보이거나, 완전히 쓸모 없는 것 대신 좀 하찮아 보이거나, 완전히 소실된 것 대신 꺼져가는듯 보이게, 지워진 것이 아니라 약간의 자국이 남은 듯 보이도록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래야만 내가 살아가는 이 사이 공간의 없음 한쪽 끝 바로 직전에서 완전히 끝난 무언가가 아니라 여전히 생성 될 수 있는 여지의 공간 안에 나를 조금 너그럽게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친구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어쩌면 너는 멸망을 한번쯤은 겪어본 것 같다고 말했다.

한번쯤 경험해 본 것 같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있음을 꿈꾸어 보다가 차라리 없음을 택하리라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무너뜨려본 경험.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 남은 흩어진 흔적과 자국들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납작한 세계 직전의 언어가 되었다. 세상 가장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아닌 말 말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무언가를 찾아낸다면

그것은 상상력일까, 우연일까, 필연일까.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은 상상력과 우연의 조합이 만들어낸 필연 같다.

나는 필연처럼 우연의 자국들을 보며 상상력을 가동한다. 상상의 맨 마지막 자락에는 언제나 어떤 언어들이 피어 올랐다.


없음에서 창조된 있음은 가장 가볍게, 없는 듯이, 흔들리도록, 무의미해 보여야 한다. 없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연약한 있음… 나는 그런 말을 하고 싶다. 


 


2.

너는 대체 어떤 멸망을 겪었냐는 물음이 있었다.

어떤 멸망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세상에 멸망을 겪지 않은 이들은 없다. 단지 자신의 무너짐을 인식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나는 나의 내면에서 소복히 쌓인 소금 사막이 제아무리 습기에 절어 단단해졌더라도 매일같이 겉표면이 풍식되고 풀풀 날아가고 있는 짭쪼름한 마음 덩어리를 발견한다. 어제보다 오늘 나는 몇미리나 더 휑해졌다. 이런식으로라면 멸망은 예정된 순서다. 그러나 딱히 불안하거나 우울하진 않다. 휑해지는 겉면의 두께만큼 퇴적되는 언어의 질량은 늘어난다. 멸망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의 시작이다. 


언어가 존재하는 한 그 어떤 천재들도 완전한 무의 세계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무에 대한 천재적인 상상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생각 끝에 나는 언어를 해체 시키겠다는 둥, 언어를 무너뜨리겠다는 둥, 죽음으로써 언어의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 날 수 있겠다는 둥의 구닥다리 이야기를 멈출 수 있었다.(혹여나 과거의 내 인터뷰 내용에서 이러한 내용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지금의 내가 아니라 이미 멸망하고 없어진 나이다.) 오히려 나는 언어를 긍정함으로써, 유기물처럼 생을 지속하는 언어와 한 몸이 됨으로써, 승부수없는 언어와의 대결 구조에서 해방된 나를 발견함으로써 전방위로 조여오던 어떤 외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멸망하기 전에 나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너는 왜 말라빠진 문어처럼 바짝 쪼그라들었냐는 것이다. 바다를 유영하는 촉촉한 문어가 완전히 쪼그라들었다는 것. 그렇게 말라 비틀어 죽은 나. 그래서 후생에는 물로 태어나고 싶었나 보다. 새롭게 언어를 배워가며 자꾸만 물을 상상한다. 물은 움직인다. 


언어에 민감한 사람들이 가지는 공통점 같은 것이 가끔 보이는데 그것은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시간차를 두지 않고 곧바로 잘 감각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움직임을 잘 감각하는 사람들은 복잡하고 섬세한 언어 회로를 가지고 있다. 극도로 예민한 언어 감각을 보여 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그들이 거치고 있을 강도 높은 정신적 노동에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진화한 언어 회로는 얼마나 많은 멸망의 결과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무너져내리고 싶다. 무너질 일이 있어서 무너지는게 아니라 무너져야만 하기 때문에 무너질 것이다. 다소간의 용기가 좀 필요할 것 같다. 좋아하는 시의 한 구절에서 처음이 어렵지 두번째부터는 쉬웠다는 말이 위로가 된다. 




3. 

말은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다 내뱉을 입도 없고 배설할 구멍도 없는데 옆구리를 몇 번을 더 터트려야 원하는게 흘러나올까.




4. 

미지의 우주는 시작도 끝도 머리도 꼬리도 입도 항문도 없어 보인다. 굽어보이기도 하지만 펼쳐져 보이기도 한다. 어두워 보이기도 하지만 찬란해 보이기도 한다. 완전해 보이지만 먼지처럼 쓸데 없다. 그래서 궁극으로 가는 길은 목적지가 없는 무한대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수한 언어의 세계를 우주에 비유하자면 그 세계의 궁극점을 찾고 있는 수많은 예술가들은 실패를 거듭할 수 밖에 없다. 숙명적으로 실패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예술이다. 그 실패들이 쌓은 수많은 무덤들이 밀어 올리고 있는 땅에 예술이 존재하고 내가 존재한다. 이 세계에서 유독 불쑥 솟아 오른 땅은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송곳처럼 어둠을 내리 꽂는 바늘일 것이다.


세상은 모조리 편리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분류체계와 시스템들, 형식과 구조들은 다수가 이용하기에 유리한 방식으로 세상을 짜깁기 해 두었을 것이다. 우리가 직선이라고 부르는 것들, 사각형이라고 부르는 것들,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들에는 세상과 언어가 타협해서 명명하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들은 그 유명한 시의 이야기처럼 불러줌으로 인해 의미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연의 의미가 차지하는 자리를 이름에게 내줌으로 인해 스스로 텅 빈 기표가 되는 일이다. 이름 붙여진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피사체의 희생이 따른다. 이름의 프레임 안으로 재단 되고 짜깁기 되는 것이다.


이름이 육체에 붙어 있는 사람이 있을까. 몸에 붙은 손가락을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름이 잊혀질까 걱정하는 시간은 많았다. 육체는 능동이고 이름은 수동이다. 몸에 붙은 내 손가락이 낯설게 느껴지는 날보다는 내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더 많았다. 언어로 명명된 것들은 휘발 되기가 쉬웠다. 작품은 생각이 나는데 그 제목은 떠오르지 않는다거나, 그 작가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가끔 ‘그 작가 이름이 무엇 무엇인데 몇 년도에 어떤 어떤 작품을 했고…’를 아주 쉽게 열거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할 때가 많았다. 붙여진 것들을 잘 기억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어딘지 모르게 긴장이 됐다. 기억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를 그렇게 불편하게 만들었던 언어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다. 언어화 되는게 불편해서 언어를 열심히 밀어냈더니 내 세계의 끝 테두리에 온통 언어만 모여있다. 파도가 쉴 새 없이 밀어내고 있는 모래땅처럼 내가 밀어낸 것들은 영토가 된다. 그래서 결국 언어의 영토를 피하지 못했다. 그 땅의 지형을 유추해 봄으로써 그 지형도 밖의 세계를 상상해야만 한다. 역시 실패로 돌아갈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경로를 이탈하고 좌초하고 흔들리며 하나의 실패라도 더 쌓아내야만 한다. 실패의 두께가 두꺼워질수록 우주에 낼 수 있는 구멍의 길이가 길어졌다. 



nowhere, but ---here
A place that does not exist, but does exist




5.

나는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고 물을 뿌렸다. 물감이 발려진 평면의 세계가 원본의 세계라면 물을 뿌린 후 우연히 만들어진 물자국은 단단한 세계에 균열을 만드는 하나의 독립 사건같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의미가 되기 이전의 것, 우연한 흔들린 자국처럼 보이는 것들은 무엇인가로 인식되기를 기다리는 것들이 아니다. 혹은 무엇인가로 인식되기를 강요하는 것들도 아니다. 


비 온 뒤 생긴 물웅덩이가 하루 대낮에 금방 증발해서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내 그림은 자칫 아무 것도 아닌것이 될것 같은 느낌이었으면 좋겠다. 개념의 토대가 너무 연약해서 기존의 어떤 언어로 이미지를 잡아두는것이 힘들 만큼, 그래서 도리어 자꾸 다른 언어를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힘이 생기기까지 작업의 과정을 통해 좀 더 긴 시간 동안 내가 원래 알고 있던 언어를 망각하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